프랑스 문화 예술 산책
의상과 유행의 나라 프랑스 -1
프랑스는 세계의 유행을 만들고 선도한다. 하지만 프랑스에 도착해서 거리를 걷다 보면 프랑스에는 유행이 없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옷을 입고 싶어한다. 유행을 만드는 사람들은 있지만 유행에 따라가는 사람이 없다.
집을 나오기 전에 차려 입는 옷에 대하여 저녁이면 벗어 던지는 옷에 대하여 프랑스에 살면서 한번은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이번 컬럼의 주제로 잡았다.
단어가 신분을 정해준다
프랑스어로 정장(costume)과 의복(habit) 이라는 단어는 관습(coutume)과 습관(habitude)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정장을 차려 입는다는 것은 사회적 행위로서 관습은 남을 의식해서 남을 위하여 옷을 입는 경우에 해당된다. 의복을 차려 입는 일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습관적 동작이다. 정장을 차려 입든 그냥 옷을 습관처럼 걸치든 의상은 유행과 같아서 현재적이고 새로움으로 보여진다.
프랑스 의상의 역사
13세기에 이미 일반적인 의상의 규칙은 사법관과 영주들이 마을 단위 안에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동네마다 마을마다 미풍 양속을 지키며 자기 지방의 의상 산업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지키고 너무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사회 계층간의 차이를 보여 질 수 있도록 규정을 정하였다.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에서 의상은 곧 신분이었다. 현대에 와서 유니폼을 거부하지만 당시에는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이었다.
여인들의 옷깃이 어깨까지 넓어 졌다. 치마는 종모양으로 만들었고 크게 풀어헤친 가슴받이(corselet)가 있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집안에서 여인들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여인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 여인들은 얼굴을 천으로 가렸다.
이태리나 독일에서는 목 주위에 짐승털로 만든 “벌레집”이라고 부르는 목도리를 둘렀다.
이태리 여인들을 제외하고 프랑스 영국 독일의 여인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내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천이 머리에서부터 내려오는 두건 같은 모양의 가리개를 사용하였다. 여인들의 날씬한 몸매는 허리는 졸라매고 오십센티정도 되는 용수철이 들어간 가슴 받이로 만들었다.
14세기 궁중의 의상 오뜨 꾸뛰르의 시작
14세기부터 궁중 의상이 퍼지기 시작하고 빠리 고급의상(La haute couture parisienne)의 전통은 궁중에서 시작된다. 귀족은 특권으로 모든 진정한 간섭을 받는다. 혁명 직전까지 삽화로 그려진 의상연감은 빠리의 유행을 프랑스 지방과 유럽에 알려주었다.
직물의 발달
샤를르 7세(그림)가 비단의 사용은 충분한 수입이 증명된 귀족들에 한하여 허락하며 황금과 비단으로된 옷감이나 침구류 사용을 금지시켰다. 비단의 직조는 왕실이 직접 관장하였다.
시민혁명과 의상의 자유
18세기의 여성 의상 중 팬티는 예절의 문제로 공연중인 오페라의 여성들에게는 경찰의 명령으로 의무화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제 1공화국 치세 1793년 10월 29일 법률로 시민들은 원하는 대로 옷을 입을 자유를 갖게 되었다. 의복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혁명 이전에 귀족들이 입던 큘로뜨(culottes 그림)는 신분의 차이를 확실히 하며 쌍큐로뜨(sans-) 들의 신분과 구별하며 의복은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단어의 의미 변화에서 나중에 큘로뜨는 바지가 아닌 팬티로 사용된다. 지금의 사람들은 쌍큐로뜨를 속옷을 못입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연상하게 되는데 실제의 의마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고급의상(haute couture) 과 기성복제조(confection)
19세기 의상(la mode)의 창작자들은 스스로 탐미주의자로 자처하였다. 부르쥬와 코드 맞춘 종사자들이 아닌 독립된 자기 색깔을 갖기 시작한다. 의상은 고급의상의 발전과 축을 같이 한다. 엘리트 층의 고객들은 새로운 귀족계급이 되어 상류층을 형성하게 된다.
산업혁명과 함께 19세기 전반인 1830년대 기성복제조(봉제업 la confection)가 나타난다. 나중에 기성복(prêt-à-porter)이라고 부를거다.
프랑스 산업혁명(1830-1870)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회화의 발달과 더불어 물감이 공장 생산되기 시작한 것처럼 천에 색을 주는 염료도 발달한다. 거의 모든 생산 부문 에서 기계가 사용되기시작한다. 첫 번째 바느질 기계가 발명되어 특허를 요청한 해는 1830년이다. 리용지방 생떼떼엔느에서 바흐뗄레미 띠모니에(Barthélemy Thimonnier)다. (그림 Arts et Metiers 박물관에 소장된 1830년 띠모니에의 재봉틀) 재봉틀의 발명으로 제품 생산에 속도가 붙어 이제는 의복 생산과 유통의 혁명이 시작된다. 재봉틀을 발명한 덕분에 군복 주문을 받아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기계가 사람의 손을 대신하게 되면 직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한 봉제노동자들의 분노가 띠모니에의 봉제공장을 때려 부수어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대부분의 발명가들이나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발명특허의 큰 혜택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유통의 혁명과 백화점의 탄생
산업혁명의 시대에 가장 큰 변화는 유통의 혁명으로 기존의 창고업이 개방형으로 바뀐다. 고객이 필요한 물건은 창고 직원이 주문에 따라 찾아서 내다 주던 것을 이제는 고객이 직접 창고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집어 나와 계산대에서 상품가격을 지불하게 된다. 이 유통구조의 간단한 변화는 엄청난 소비문화를 조장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에 잠복해 있는 욕심과 과시욕을 자극하여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눈에 들면 무조건 들고 나온다. 창고가 백화점으로 새로 단장하게 된다.
빠리시내의 “싸구려”라는 의미의 창고 르 봉마르쉐는 첫 번째 백화점으로 기록된다.
아리스띠드 부씨꼬(Aristide Boucicaut)는 오 봉 마루쉐(Au Bon Marché)의 단추가게에 고용되어 1854년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처음 도입한 청년이다.
1855년 루브르 백화점(Grands Magasins du Louvre) 프렝땅백화점(Au Printemps 1865) 그리고 사마리뗀느(La Samaritaine1865) 갈르리 라파이에뜨백화점(lesGaleries Lafayette1894)이 19세기의 유통혁명에 동참한다.
백화점 광고: 여인들의 천국에서. 신제품으로 가득찬 거대한 매장. 아주 싼 값으로 소문난 상설전시장. 입장 무료)
(다음주에 이어서 계속)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