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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이야기
2016.06.26 22:07
그림이 있는 여행 - 고갱과 함께 ( 2 )
조회 수 4761 추천 수 0 댓글 0
그림이 있는 여행 - 고갱과 함께 ( 2 ) 고갱은 자기 방식대로 예술로 먹고 살 궁리를 하였다. 부인이 자기의 그림을 팔아 가정을 돌보아야 했지만 부인은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예술로만 살아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재정상태는 엉망이 되었다. 가족과 살기 위하여 생활비가 저렴한 후앙으로 떠났지만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덴마크로 돌아갔다. 12년 부은 보험 계약을 해지 해 그 걸로 3달을 버텨 보려고 하였다. 10개월을 후앙에서 40여 점의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결국 고갱도 10개월 후에는 겨우 배삯만 구하여 아내와 다섯 아이가 있는 덴마크로 떠났다. 12월에는 이미 코펜하겐에 도착하였다. 1885년 처가 식구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아들 끌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다. 파리로 돌아와 슈훼네케르 집에 머문다. 산업 혁명의 시대에 궁핍과 질병에 빠져 살게 되면서 작품은 가끔씩 팔리고 친구 슈훼네케르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작품들은 비평가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다. 역에서 광고전단을 붙이는 일을 3주간 한 후에 정식 직원으로 몇 달 근무하였다. 1886년 당신이 길게 쓴 편지로 찾아온 동생이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지붕에 대고 소리 질렀다. "내가 불쌍한 놈이라고 그리고 그림 때문에 베르뗑 회사를 때려 치고 이 불쌍한 마누라는 집도 가구도 생계비도 없이 버려졌다고, 이 끔찍한 그림 때문에…." 1986년 5월 24일 부인에게 쓴 편지
인상주의와 결별 1886년 인상파들의 8번째 마지막 전시회에 참가하였다. 모네, 르느와르, 시슬레, 까이이보뜨는 불참하였다. 이 전시회의 주인공은 고갱이 아니라 결국 점묘법, 분할주의라고 하는 신인상파의 쉐라와 시냑이었다.
1886년 쉐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이 작품은 산업혁명 시대의 주말 풍경과 당대의 부르주와 의상에 관심을 주고 있다. 기법으로는 점을 찍어 시각적인 결합을 유도하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게 한다. 점을 찍는 일은 요즈음의 카메라의 픽셀과 같아서 가능하면 많이 찍어야 하겠지만 실제 화가가 2만 점 이상의 점을 찍은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점 찍기 지쳐서 그랬는지 점묘의 기법으로 일생을 그린 화가는 없었다. 뽕 따서의 상징주의, 그리고 종합주의벤에 뽕 따벤(Pont-Aven)은 땅 끝 대서양 변의 브르따뉘 지방의 항구 마을이다. 1886년, 이 작은 항구의 어촌 마을에 폴 고갱이 찾아온다. 그는 이름 없는 몇몇 화가들과 어울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의 이 바닷가 마을에서 예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작품들에 진력한다. 그는 뽕 따벤의 추억을 회상하기를 "나는 브르따뉘를 사랑한다. 그곳에서 나는 야성적인 것과 원시적인 것을 보았다. 나막신을 신고 화강암으로 된 길을 걸으면 돌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림에서 찾던 바로 그 소리였다." 기존의 인상파 화가들도 각자 자기들의 길을 찾아 가기 시작한다. 일부는 후기 인상파의 기치아래 잠시 다시 모여든다. 결별의 시간이 다가 왔다. 인상파들과 별개로 새로운 경향의 상징주의가 태동한다. 시인 장 모레아스의 선언으로 새로운 경향은 시각적인 디테일로 관찰된 사실의 객관적인 회화가 아닌 독특한 주제의 성격의 회화로 필수적인 선으로 상징을 그려 나간다. 86년 8월 뽕 따벤에서 에밀 베흐나르(Emile Bernard, 1868-1941)를 처음 만난다. 그는 분할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을 들고 나왔다. 색깔로 구획을 나누어 각각의 영역을 정하여 그려나가는, 마치 색유리창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여기 뽕 따벤 글로아넥 여관에 인상파 화가 고갱이라는 자가 있어요 자기부모에게 에밀 베르나르가 보낸 편지. 이 곳에서 3개월을 지내고 같은 해 다시 파리에 돌아와 11월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다.
마르티니크의 풍경 1887년 1887년 4월에는 화가 샤를르 라발(Charles Laval)과 파나마 건설 현장으로 간다. 돈이 모이면 선원 시절 보았던 마르티니크로 가고자 하였고 그해 6월부터 9월까지 마르티니크에 머물렀다. 그 곳의 빛과 풍경에 반하여 그림 열두 점을 남겼다. 그리고 이름 모를 사생아 딸아이를 얻었다. 그리고 동료 라발과 빈곤과 질병에 찌들어 그 해 11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8년 초, 파리로 돌아 오자 곧 뽕 따벤으로 달려 간다. 이 곳에서 인상주의를 포기하고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 상징주의의 흐름으로 새로운 회화 이론인 종합주의(Synthétisme) 회화를 구상하고 발전시켜나간다. 이론의 틀에 그림을 맞추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평가들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예술을 박제화 시키고 틀에 가두기를 좋아한다. 그의 연구는 형태를 단순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단색과 테두리를 사용하여 얻은 단순화 작업으로 필수적인 형태만을 간직하기 위하여 디테일을 제거한다. 그는 일찍부터 경험에서 나온 자신의 미술 이론을 동료 화가들에게 가르쳤고(뽕 따벤 화파) 색채의 대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실천으로 옮겼다. 에밀 슈훼네케르(Émile Schuffenecker)에게 보낸 편지에 다가올 예술적 논쟁의 영혼이 될 신조를 표현한다. 예술은 추상이다
"하나의 충고 : 너무 자연을 복사하려고 하지말라, 예술은 추상이다. 자연 앞에서 꿈을 꾸면서 추상을 끌어내라. 결과보다는 창작에 대하여 생각하라. 우리의 신성한 주인께서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창조한다는 것." 그의 그림의 시작이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또 다른 자기만의 회화의 비젼을 구상한다. 그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나 비슷한 것을 찾는 작업에서 등을 돌렸다. 그는 예술이 해야할 일은 보이는 것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드니,테라스의 햇빛의 흔적 1890 잘 조합된 질서가 있는 평평한 면 위에 색깔을 작열시킨다. "이 나무를 어떻게 보나?" 아르모르 숲 한구석에서 고갱이 말한다. "정말 녹색인가? 그렇다면 녹색을 칠하라고, 당신 팔레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녹색을 칠하라고. 그리고 이 그림자는 좀 푸른 색? 가장 푸르게 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로아넥 여인숙에서 만난 고갱과 폴 세뤼지에의 대화록이었다. -모리스 드니의 기록- 미술 교육도 받지 못한 고갱은 프랑스 최고의 예술학교를 나온 친구들에게 충고했다. 인디언 피부에, 단순하고 명철함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한 인간은 거칠 것이 없었다. 회화에 전념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부인과 아이들과 안락한 가정생활, 안전, 세상의 시선, 예술에 불필요한 모든 것은 버린 이 이상한 존재 앞에 폴 세뤼지에와 모리스 드니는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고갱은 이미 대양을 모두 다 돌아 보고 막 서인도 제도에서 돌아와 이제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다시 떠날 꿈을 꾸고 있었다. (다음주에 이어서 계속...)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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