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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심원의 사회칼럼
2017.06.19 21:50
발전을 위한 토론 문화
조회 수 1062 추천 수 0 댓글 0
발전을 위한 토론 문화 인간은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 왔다. 논쟁은 다툼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자기표현이며, 다른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검증하는 수단으로서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과시를 위한 논쟁이라면 인간은 그 논쟁으로 인하여 내면의 특성인 순수함을 상실하게 된다. 사회생활하다 보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의 씨가 먹히지 않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자기 생각으로 무장한 사람은 타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게 되며 대화가 아니라 논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자들과 말을 섞기가 두려울 때가 있게 된다. 그래서 논쟁은 양면성이 있다.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다투는 한 면과 발전을 위한 토론의 쟁론의 한 부분이다. 언젠가 서울역에서 지방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노숙인들의 다툼을 들었다. 듣기에는 별로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었지만 밤을 지새워야 하는 그들로서는 중요한 논쟁거리였을 것이다. 한 두 사람의 다툼은 패거리가 되고 서로 자기만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우기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그들의 논쟁을 들으면서 그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모습이 그대로 국회로 옮겨져서 해결책 없는 당쟁을 위해 서로 싸우곤 한다. 정치를 해야 할 사람들이 발목을 잡아야 할 논쟁거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나 노숙인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작은 이야기 거리로 논쟁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논쟁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차원적 수준의 쟁론이다. 논쟁은 어떻게 보면 토론 문화이다. 인격을 존중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쟁론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는 것이다. 좋은 주장은 칭찬도 하면서 더 나은 합일체를 찾기 위한 민주주의 한 방편인 것이다. 영국의 국회에서 거의 매일 열리는 정치 토론 문화는 그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유래일 것이다. 입장할 때는 서로 인사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서의 주장을 하면서 박수도 보내지만 때론 야유도 보낸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심도 있게 경청하면서 반대와 질문을 통해 검증하게 된다. 토론에 심취하다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야 할 일이 있다. 그럴 때 규칙이 있다. 인신공격을 하지 않고 그가 주장하는 쟁점에 대한 비판만을 하는 것이다. 논쟁은 말로써 하는 것이다. 모든 쟁론의 본질인 셈이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말의 중요성은 어떻게 보면 최고의 정점에 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수준과 능력은 그가 구사해 내는 언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 했다. 고려의 서희장군(942-998)은 거란족의 십만 대군을 혈혈단신으로 몰아내기도 하였다. 서희장군의 무기는 언어였다. 말 한마디로 십만 대군을 무찌른 셈이다. 말을 잘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 말에 담긴 진실과 거부할 수 없는 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것 역시 그 말에 담겨진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말은 단순하게 입 밖으로 내 뱉는 흉내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인격과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마음의 순수함을 상실하게 되면 위선적인 말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위선적인 말이란 입으로 뱉어지는 말과 마음에서 떠오른 것이 서로 다른 경우이다. 우리 민족에게 존재하는 “빈말” 문화는 뿌리 뽑아야 할 암적 요소이다. 마음에는 원하지 않지만 체면유지를 위해서 선심성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빈말 문화가 있기 때문에 옛 성인들은 사양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빈말로 무언가를 권할 때 바로 응하게 되면 법도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한두 번 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양을 해도 계속해서 권하게 되면 못 이기는 척 하며 응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다. 민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낙숫물의 연약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바위에 아름다운 구명을 내는 기간 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문화는 삶의 방식이다. 삶의 방식이 문화로 정착되려면 보편성과 편리성, 수용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 민족에는 고유한 것들이 많이 있다. 음식과 의복, 예에 관한 것이다. 한국의 한복은 세계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현대 의복은 제한적이다. 몸이 조금만 불어도 입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현실적이며 제한적인 옷이다. 그러나 한복은 웬만큼 살이 쪄도 입을 수 있다.
외국에 살다 보니 한복을 입어야 할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한복을 빌려 입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웬만하면 한복은 몸에 맞춰 입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양장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수용성이 있지만 현대인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성 때문이다. 2002년도에 개봉된 YMCA 야구단 영화가 있다. 개화기 시절 젊은이들에게 새롭게 선보인 야구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최초의 야구선수 복장은 한복이었다. 오늘날 한복을 입지 않는 것은 수용성은 있지만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하게 되면 보편성과 편리성에서 배제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의 문화는 세계 어느 곳으로 갈지라도 그곳에 그들의 문화가 있기에 전혀 낯설지 않게 된다. 지구촌은 지금 보이지 않는 문화논쟁으로 우월성을 가리고 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선진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진국이라면 후진 문화가 있기 때문에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문화논쟁의 쟁점이다. 많은 나라가 아프리카나 절대빈곤의 나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선한 일이어서 도움 받는 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믿어진다. 그러나 문화적 우월감은 그렇지 못한 이들로 하여금 영원히 그들의 문화의 틀에서 나올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상위문화와 하위문화가 세상에 존재한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화적 격의 기준은 문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력으로 결정 된다. 문화는 결국 물질만능주의를 만들어 낸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그것이 상위문화요, 빈곤에 처한 문화는 하위문화여서 상위문화는 언제나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세워 하위문화를 다스려 온 셈이다. 그러하다보니 하위 문화권에 있는 민족들은 상위문화권의 이기심으로 문화논쟁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이 민족을 학살해야 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지 조심스런 진단을 하게 된다. 모든 문화는 평등해야 하며,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문화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문화 이전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의 방식이 문화이기에 문화를 무시하게 된다면 그들의 삶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영국은 노예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나라였다. 아프리카로 거대한 군대와 군함을 앞세워 힘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았다. 18세기 영국의 양심이라 불리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berforce, 1759 - 1833)에 의해 고질적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려면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개인적인 문화든, 단체의 문화든, 종교적인 문화든, 국가적인 문화든 서로 존중할 때 문화를 통하여 서로가 발전할 수 있게 되며, 파멸로 이끄는 문화논쟁에서 자유 할 수 있게 된다. 인류의 발전은 논쟁을 통해서였다. 많은 논쟁은 결국 세련된 문화를 만들어낸다. 불필요한 문화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유익하고 모범이 될 만한 것은 현대에 남아 있게 된다. 성숙한 사회는 논쟁이 발달 되어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말로써 쟁론하는 것이다. 한 도심에 의미 있는 의자가 제작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의자를 힘겹게 들고 있는 모습이다. 우스꽝스럽지만 그 모습은 마치 현대인들의 수준 높은 논쟁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든 학문이든 그렇게 쟁론의 결과 오늘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렇게 쟁론하는 틈에 문화는 성장해 왔다. 두 사람이 마주 잡고 땀 흘리는 논쟁의 틈새에 앉아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나라가 이제는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그 허물어진 경계에 존재해야 하는 것은 존중일 것이다. 문화를 존중하는 것은 그 문화를 만들어 온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다. 서로 쟁론하는 것은 인신공격을 위함이 아닌 발전을 위해 수준 높은 토론 문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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