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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7.07.03 22:11
작업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 나는 모른다- 피카소4
조회 수 4976 추천 수 0 댓글 0
작업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 나는 모른다 피카소4 5.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들이마시는 광대처럼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어떻게 그처럼 많은 그림을 그렇게 빨리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옮길 지 사전에 모른다. 심지어 어떤 색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업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 나는 모른다. 그림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자신을 공중에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 땅에 내려설지도 전혀 모른다.”
Still Life with a Bottle of Rum, Pablo
Picasso, 1965 그는 주로 한 번에 서너 장의 그림을 펼쳐 놓고 동시에 작업했다. 여러 캔버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11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기 위해서 붓을 내려 놓았다. 이런 그를 보고 그의 애인이었던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는 그에게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몸은 바깥에
가 있어.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신발을 밖에 벗어두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피곤할 수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스무 살의 피카소를 본 화가 브라크는 그가 마치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들이마시는 광대처럼’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정열적인 기질은 아흔 두살, 그가 죽을 때까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Pablo Picasso 6. 나에게 회화는 파괴의 결합이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이지만, 화가로서 머문 곳은 프랑스였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로 건너왔다. 파리의 예술가들은 오래지 않아 이 젊은 스페인 예술가의 천재성에 놀라게 되었다. 아폴리네르, 로랑생, 모딜리아니, 앙드레 살몽, 브라크 같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몽마르트르에 모여 들었고, 이들은 ‘세탁선(Bateau-Lavoir)’이라 불린 피카소의 아틀리에에 모여 함께 지냈다. 당시 친구이자 시인인 막스 자콥과 함께 지내면서 피카소는 그의 청색 시대(1901-1904)의 작품들을 그렸다. 가난하고 아픈 시절이었지만, 그는 그 와중에서도 파리의 발전상을 고향에 있는 스페인의 부모에게 알리는 노력을 마다 하지 않았었다.
망토입은 자화상, 파블로 피카소, 1901-1902
The Blue Room (The Tub), Pablo Picasso, 1901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의 후원가로 널리 알려진 거트루드 스타인과 레오
스타인은 피카소를 첫 방문 했고, 800 프랑의 그림을 사면서
피카소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피카소는 당시 이들의 소개로 야수파의 창시자인 앙리 마티스(1869-1954)와도 만나게 되었다.
Blue Nude, 피카소, 1902 1903년에 그린 아래의 작품
‘늙은 기타리스트’는 기타치는 눈 먼
노인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노인의 외로움과 슬픈
탄식의 노래 가락으로 피카소는 자신이 체험한 외롭고 헐벗고 굶주리며 사회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피카소의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동정심, 연민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Old Guitarist, Pablo
Picasso, 1903 이 작품의 주인공은 늙고 가난한 것도 슬픈데 거기다 눈 마저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결국은 사랑이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문제는 사랑에 있다. 그래서 화가들은
눈을 빼내야 한다. 마치 황금 방울새가
더 잘 노래하도록 눈멀게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라고 말했다. 1905년 청년 피카소의 ‘청색 시대’가 지나가고, 그는 소위 장밋빛 시대(1905-1906)를 맞았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렀을 때 그려졌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친구 카사헤마스가 사랑에
실패해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권총 자살을 한 후,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심리적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나, 1904년 피카소가 파리에
다시 왔을 때 그는 모든 스페인의 슬픔과 현실을 잊고 프랑스의 감성적 환락 속에 빠져 살면서 자신을 즐겼다. 이것은 일찌감치 피카소
그림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후원자가 되어 준 미국계 유태인인 거트루드와 그의 오빠 레오 스타인 덕분에 그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밍웨이에게 짧은 문장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거트루드 스타인은 특히 피카소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피카소의 전기도 썼고, 피카소는 그녀의 초상화도 그려주었다.
거트루드 스타인 이렇게 해서 1904년부터 피카소의 그림에
밝은 장미색이 조심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의 가난하고
절망적인 파리의 생활에 변화가 온 징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생활 주변에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서히 팔리기 시작하는 피카소의 그림들 외에도 극적으로 한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시절, 석유를 살 돈이 없어 등잔 대신 왼손에 촛불을 들고 오른손으로 밤새 그림을 그리던 때에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났다. 번개 치고 소나기 내리는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세탁선 건물로 비를 피해 뛰어들었다가 마침 새끼 고양이를 구조해 자기 화실로 가면서 복도에 서 있던 당시 검은 눈의 매혹적인 피카소와 마주쳤고 그에게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Pablo Picasso & Fernande Olivier 1905 페르낭드는 피카소에게는
단순한 애인만이 아니라 모델로서 그의 그림의 새로운 활력소였다. 피카소보다 넉 달 먼저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페르낭드 벨르발레 (Fernande
Bellvalle)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증명서에는 아멜리 랑 (Amelie
Lang)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사실은 그녀는 부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그녀를 원치
않아서 고아로 자랐다. 십대의 소녀 때 자기를
유혹하고 강간한 남자인 폴 페르세롱 (Paul Percheron) 에게 고모가 그녀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폭력에 찬 불행한 결혼
생활에 견디다 못한 페르낭드는 결국1900년 어느 봄날 남편
몰래 마침내 도망쳤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첫 인상에 대해서, “그는 작은 키에 까무잡잡했으며 몸집도 작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으며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이었다”라고 묘사했다. 두 사람은 1905년부터 1912년까지 동거를 했다. 쓰레기 더미 같은 화실에서 피카소는 미친 듯이 페르낭드를 사랑하다가, 페르낭드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화실에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페르낭드는 “잠깐만요, 옷을 입을 때까지 좀 기다려주세요!”하고 외치곤 했다고 한다.
Harlequin Sitting on a Red Couch, Pablo
Picasso, 1905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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