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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심원의 사회칼럼
2017.08.28 22:14
취업이 목적인 교육에 조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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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이 목적인 교육에 조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인간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배우면 배울수록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되지만, 배우지 않으면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바르게 배운 사람은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요, 설 배운 사람이 아는 척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다. 배워야 하는 것은 지식은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터득해서 논문을 발표하여 그 분야에 권위자가 될지라도 실상 그 지식은 그만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어떠한 지식이든 인간이 존재했던 순간부터 축적된 바탕위에 학문의 탑을 세웠을 뿐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대부분의 지식들이 현대 문명의 시대에는 보편화된 상식이 되었다. 밤을 지새우며 신문을 스크랩 하고 방송을 캐치하여 정보 파일을 만들었던 일들이 이제는 큰 비중을 차지 않게 된다.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읽고 한 벽 가득 매운 파일들 속에 묻혀 씨름 하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작은 컴퓨터 안에 인류역사가 존재할 때부터 남겨진 모든 발자취들을 열람할 수 있다.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 골방에서 전 세계 유명 도서관을 방문할 수 있으며,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다운 받아 복사할 수 있다. 인터넷 상에 숨겨져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 필기하기 보다는 PDF파일로 복사하여 정보지식 곳간에 쌓아 놓으면 언제든 검색이 용이하게 되며 필요할 때 인용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골방 책상 가장 밑에 특별한 가위가 있다. 십 수 년 전에 구입한 것인데 가윗날이 50cm나 된다. 지인들에게 가위를 보여 주면 깜짝 놀란다. 가위의 용도는 신문 스크랩 전용가위다. 필요한 기사를 스크랩할 때 한 번에 쭈-욱 자를 수 있는 특별히 제작된 것이지만 책상 밑에서 고스란히 잠자고 있다. 그 가위를 사용해 본지도 십여 년이 넘은 듯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제는 그렇게 수고하여 신문을 스크랩하여 저장하지 않아도 더 용이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으며 보관할 수 있다. 손톱만한 크기의 메모리스틱에 내 인생이 모아온 자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보를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내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한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 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지식 정보화 시대가 오면서 종이로 된 책을 읽는 것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여행할 때 여러 권의 책을 들고 다니며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작은 태블릿 안에 수천 권의 책이 파일로 저장되어 있어서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 집중하여 독서할 수 있다. 내 인생이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은 한 도서관이 그 안에 들어 있으며 인터넷만 연결이 된다면 세계 도서관을 등에 메고 다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타 지역을 방문할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그 지역의 대표 도서관에서 잠시 쉬어 가는 것이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한 곳에 앉아 글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여유치 않을 때는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도서관은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한 수준이다. 수박을 살 때 겉으로는 그것이 잘 익었는지 알 수 없다. 삶의 연륜이 있는 주부라면 두드려 보고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지만 초보자들은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아 소리로는 구분할 수 없다. 겉으로는 확인 할 수 없었던 것이 피라미드 모양의 수박 파이를 꺼내 볼 때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도서관은 마치 수박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 지역의 문화를 꺼내보는 것이다. 도서관이 커야 좋은 것은 아니다. 도서관 안에서 공부하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지역 문화적 수준의 단면도라는 의미다. 물론 도서관이 소장하는 책들의 규모로 그 지역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장한 책의 숫자나 도서관 시설물의 현대적 편리함과 규모로 지역의 문화를 판단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그 지역의 문화적 척도가 된다는 의미이다.
도서관을 드나들고 그곳을 놀이터 삼아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결국 지역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 반열에 서게 된다. 이 표현이 꼭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도자가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도서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적 기류다. 음침한 골목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담벼락에 그려져 있다. 그라피티(graffiti art)라는 예술 분야로 구분되어지지만 어른들이 보는 세계는 그냥 무질서한 낙서일 뿐이다. 좀 화려한 낙서일 뿐이지 그것을 예술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한 청년이 몇 차례 젊은 청년들에게 매를 맞고 돈을 빼앗긴 형제를 만난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고민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그가 다니는 길은 어둡고 음침한 골목길이었다. 그래서 간단한 처방을 내려 주었다. "밝은 곳으로 다녀보세요, 가급적 골목을 피하세요, 저녁에는 외출을 삼가 하세요." 몇 년이 지난 후에 그의 고백을 들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불량배들을 만나지 않았다며 좋아했다. 밝은 대낮에 사람이 분비는 곳에 불량배들이 이유 없이 시비 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항상 어두운 골목을 선호하게 된다. 밝은 대낮에는 빈둥거리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져야 슬슬 외출 준비하는 것은 마음이 어둡다는 증거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무언가 자기 한계를 깨트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거리를 활보하며 방황하는 것 보다 도서관 한편에 자리 잡고 몇 권을 책을 쌓아 놓고 정독하는 희열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뀐다. 신형 기기를 구입한 순간부터 구형이 된다. 아주 오래전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돈을 절약하여 목돈을 만들어 컴퓨터를 구입하기 위해 유명 매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자신이 준비한 돈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시골에 사셨던 분이라 정보가 없는 상태였기에 씁쓸히 발길을 돌려 다시 돈을 절약하여 조금 더 준비를 해서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그 돈으로도 컴퓨터를 구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려했던 기종이 이미 단종 되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준비하였으며 기종이 단종 되어서 살 수 없었고, 다시 준비했을 때 역시 새로운 기종이 출시되어서 컴퓨터를 구입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아마도 일평생 컴퓨터를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입하는 즉시로 구형이 되며 새로운 모델, 최신 기종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오는 것을 그의 마음이 따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에 도서관 무용론이 거론되기도 한다. 영국의 시골 도서관에 가면 모두가 어르신들로만 북적되고 있다. 젊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도서관 사서도 인생의 막바지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어르신들뿐이다. 책속에 길이 있다는 것이 추억의 명언이 된지 오래 된 듯하다. 책을 던져 버리고 학교를 뛰쳐나와 삶의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굵직한 기업의 CEO가 된 현실이 착실하게 학교에서 공부하고 도서관을 찾아 책과 씨름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혼미케 한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는 책안에 인생이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책을 통하여 실패한 인생을 만날 수 있으며 또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성공 이야기를 읽어 보면 성공한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 성공에 관한 이야기일지라도 실패한 이야기 뿐 이다.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 1746- 1827, 스위스)는 교육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실패했다 스스로 말하는 사람을 교육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인생이 묘미다. 실패는 성공이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실패를 이야기 하지 않고는 결코 성공을 말할 수 없다.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는 그 안에 음식을 꺼내 먹을 수 없다. 냉장고의 문은 실패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실패를 통하여 성공이라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취업 위주의 교육, 그래서 도서관에 빼곡하게 앉아서 취업 준비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도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염려가 되기도 한다.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이 거룩한 인간성을 파괴하듯, 취업 위주의 대학교육은 결국 인간의 거룩한 꿈을 갈아 먹기 때문이다. 취업이 목적인 교육에 조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염려된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seemwon@gmail.com - 목사, 시인, 수필가 -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 박심원 문학세계 - 카톡아이디 : seem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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