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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19.01.21 02:46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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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 1925년 11월 6일 클리포드 스틸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 하지만 첫날 강의 45분 만에 학교 공부는 내가 수년 전에 이미 실습했던 것들이었고, 그것들을 다시 배운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학교를 떠났다. 또한 그는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가는 진실로부터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몸이 가늘고 통뼈였으며 웃지 않는 얼굴이라 늘 성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이빨에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어서, 늘 모든 것들을 못마땅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Clyfford Still, PH-672 (Self Portrait, 18 years of age), 1923 그는 1926년 가을에 워싱턴 주에 있는 스포케인(Spokane)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학기를 마친 후 자퇴하고 캐나다로 갔다. 1931년 가을에는 스포케인 대학에 복학했는데 이번에는 장학금을 받았으며 1933년 봄에 졸업까지 했다. 1934년 이전까지 그가 그렸던 그림들은 모두 175점 가량 되는데 그것들을 그는 팔지 않고 자신의 소장품들로 모두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클리포드 미술관에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곧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1941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개인적으로 회화를 연구했다. 그는 학교에서 철학과 함께 문학비평도 공부했는데 그가 연구했던 사람들은 플라톤, 롱기누스, 베네데토 크로체였다. "나는 고전 유럽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익살스러운 주장과 풍자적인 프란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그리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 또는 1910년대와 20년대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색다른 외국문화인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Clyfford Still, PH-672 (Self Portrait, 18 years of age), 1923 1941년 그는 캔버스에서 공간과 사물의 모습들을 온전하게 정신적인 본체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그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오로지 에너지와 직관에 의해 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는 30년대 중반부터 자유에 대한 느낌이 이제 절대적이며 무한히 쾌활해졌다는 것을 자유롭게 친구와 예술가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해왔다. 1941년 12월부터 1943년 여름까지 그는 해군에 복무하면서 군수품 제조공장에서 근무했다. 1943년에는 그의 첫 개인전이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시기에 그는 굉장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1945년 이전까지 그가 그린 그림들이 450점 이상에 달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제목이 따로 없다. 이것은 그가 작품이 삽화나 그림을 이용한 어떤 퍼즐이 되기를 원치 않아서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Clyfford Still, 1944-N No. 2, 1944 스틸은 유럽의 모더니즘을 데카당스로 규정하고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당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했다.
Clyfford Still, 1953, 1953 스틸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면서 추상 회화의 본질과 형상에 혁명을 일으킨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그들은 1943년 친구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가 유사한 미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느꼈다. 이후 그들의 우정은 깊어졌고, 떨어져 있을 때에도 서로서로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유사한 미학이란 바로 고도의 이성주의에 근거한 컬러-필드 회화였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여느 예술가들과는 좀 달랐지만 두 사람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그림에는 이성적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리고 감성적 요소는 고도로 문명화되어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그림이었다. Mark Rothko
Mark Rothko, Orange and Yellow, 1956 Clyfford Still, Yellow, 1951 고도의 이성을 추구한 스틸은 대중을 무감각하고 주의산만하다고 보았으며 당시의 사회 윤리를 전체주의의 함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장사꾼들에 의해 미술계가 조작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장사꾼들은 예술가들의 존엄성이나 번영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그는 또 "평론가들은 백정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중의 창자를 위해 햄버거로 만든다.
Clyfford Still 학자들은 단순히 마비되었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사실 스틸의 작품은 뉴욕 중심의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완성을 구현한 것으로서 주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스틸은 1920년대 중반에 뉴욕이 아닌 미국 서부지역에서 새로운 화법을 구상하며 추상의 방향성을 모색했었다. (다음에 계속…) 최지혜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아트컨설턴트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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