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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의 시사 칼럼
2019.03.27 01:38
독립문과 반민특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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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의 시사 칼럼 (11) 독립문과 반민특위 서울 서대문 형무소 인근에 독립문이 있다. 격동의 시기였던 1897년에 서재필 선생이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건설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운동을 벌여 모은 국민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198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독립문을 세울 때 친일파 안경수가 초대회장, 친일파 이완용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서재필은 고문을 맡았다.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 독립문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염원하면서 세운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독립문을 세울 당시 독립은 중국(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고 엄청난 돈을 쓰면서 독립문 보수공사를 한 이유이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우당 이회영의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가문은 일제 치하에서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이며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이 집안의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 6백억원에 이르는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한 후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후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지만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며 부통령직을 사임하여 세태에 타협하지 않는 집안의 전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 2001년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신축된 우당기념관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뒤 해방 후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경학사 · 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은 바 있는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만주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 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넷째 이회영은 마흔네살이던 1910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독립운동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후일 이규창(91)옹은 독립운동 당시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회상했다.
▲ 1920년 당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처:흥사단) 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고, '민주공화국'을 정치체제로 한 망명정부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9월 11일 경성과 러시아 연해주 등 각지의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해에 단일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 · 행정 · 사법의 3권 분리제도를 정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한국광복군 조직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중국 국민당,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우리 민족의 '독립'은 1897년 독립문을 만들던 시기, 1910년 3월 26일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가 활동하던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 통일한국의 험로를 개척하던 시기 등 시기별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우리 민족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독립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와 실천정신이 깔려 있다. 최근 "해방 뒤 반민특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는 주장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반민특위는 해방 후인 1948년 8월 헌법에 따라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한 특별위원회였다. 일제의 강점에 적극 협력했거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 등을 박해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그러나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 정부의 조직적 방해와 친일 세력의 특위 위원 암살 음모,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을 겪으면서 설치 1년여 만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해체된 바 있다. 2019년 3월 1일, 국내와 세계 각지에서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렸다. 그리고 20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일재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좌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독립국가'인가 자문해본다. 하재성 jaesungha@yahoo.com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킹스톤 시의원 (Councillor of Kingston upon Th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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