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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이야기
2019.09.30 22:25
프랑스의 부유함은 누가 가지고 있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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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프랑스 이야기 프랑스의 부유함은 누가 가지고 있나 (2)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재물 세상 모든 사람이 움직일 때 이민이나 난민들도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이나 재물을 찾아 간다. 프랑스 국부의 가장 많은 부분은 국가가 소유하고 있으며 국가가 그 재물을 운용하고 있다. 샹보르 성을 주말에 빌리려면 15만 유로를 내면 된다. 프랑스 국가가 소유한 교회들, 신도들이 없어 부동산에 나온 가격을 보며 에트르따의 우편엽서에 나온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 좋은 노트르담 드 라 갸르드 교회가 28만 유로다. 에트르따 해변과 마을 그리고 해변 언덕 위에 교회 "지혜로운 자가 달을 가리킬 때, 멍청한 자는 그 손가락을 본다." 재물의 우선 순위는 부동산 1789년 대혁명 당시 '시민과 인간의 권리 선언"이 선포 되었을 때 제 2조는 소유권, 개인의 사유 재산을 허락했다. 그 이후 모든 시민은 사유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인생을 허비하게 되었다. 물론 국가도 시민처럼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애써왔다. 그리고 사회 불공정과 불평등은 보다 심화되었다. 국가가 재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부를 손에 쥐었을 때 프랑스는 대혁명 당시 1789년 10월2일 교회 재산을 접수하였을 때 헌법의회는 교회 재산을 국가 재산으로 분류하였다. 혁명의 주교 딸레랑은 교회 재산 목록을 들고 혁명에 참여하였다. 딸레랑 주교는 혁명 이 후 여러 정부에서 외교 장관으로 명성을 남겼다. 공화국 정부는 성직자를 각 도의 선거인단이 선출하고 성직자는 국가 공무원이 되어 국가에 충성하라고 요구하였다. 정부의 제안에 협력하던지, 고향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든지, 새로운 국가가 준비한 감옥에 가던지 선택은 다양했다. 시민과 인간의 권리선언에 예배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회 재산은 국가 관리로 몰수하였다. 1789년 신도의 십일조를 폐지하였다. 교회 재산 몰수와 더불어 망명한 귀족 재산의 국유화도 국가의 부를 키우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대혁명 당시 국토의 20%에 달하던 성직자들의 토지가 1802년 0%로 줄었다. 귀족의 토지 22%는 12%로 줄었으며 부르쥬와 재산가들이 16% 소유하던 것은 28%로 늘었다. 농민이 30%에서 42%로 토지를 늘렸다. 국가는 18%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당시 농민은 전체 국민의 80% 이상을 점하고 있었다. 토지 소유만 보면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쥬와 시민 혁명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국가가 몰수한 귀족들의 저택에는 공화국 고위직이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공화국의 귀족들은 직분이 주어지고 임기를 마칠 때까지 왕국의 귀족처럼 지냈다. 1802년 보나파르트 통령 시절에는 최고의 납세자로 지주와 법률가 도매상인들이 600명을 도 선거인단에 포함되었다. 제1통령 보나파르트 1815년 나폴레옹 시대 전쟁에 패한 프랑스는 여러 가지로 경제적인 측면을 다시 한 번 심사 숙고해 보아야 했다. 해상 무역 길은 다 파괴되었지만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농업이 산업화되고 생산성 증가가 이루어졌다. 도시로 해외로 원정을 경험했던 군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주저했다. 19세기는 서서히 산업화 공업화의 길에 들어섰다. 프로스페르 메리메 프랑스 국가 문화재 재산 목록을 처음 기록하고 등록한 사람은 프로스페르 메리메(1803-1870)다. 그는 31세에 문화재 국장이 되어 19세기 중반 800개의 문화재를 등록하였다. 복원 건축가 으젠 비올레 르 뒤끄 그는 알고 지내던 건축가 비올레 르 뒤끄(1814-1879)를 통하여 수 많은 중세 유적을 복원시켜 놓았다. (다음 호에 계속)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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