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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20.02.16 23:52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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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의 예술 칼럼 (243)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12. 번뇌를 그리다 아쉴 고르키는 1930년대에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공공 건물의 대형 벽화를 추상 양식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가 미로의 초현실주의나 칸딘스키의 추상미술로부터 받은 이 영향을 훗날 1940년대 마침내 자신의 양식의 밑거름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겹쳐 입힌 뒤 면도날로 과잉된 부분을 도려 내어, 화면을 두드러지게 매끄럽게 마무리 짓는 것이 바로 그의 대표적 기법이다. Arshile Gorky,The Limit, 1947 아래의 '약혼 1'은 추상표현주의 시기의 정점에 그려진 작품이다. Arshile Gorky, Betrothal Ⅰ, 1947 '시적 추상'이라 불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시의 정취를 가지면서도 개인적인 어법과 관능적인 색채의 사용이다. 서로에게 끌리듯 흘러내리는 흐물흐물한 모양의 이 느슨한 형태는 당시 고르키의 감정적 분열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1940년대에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추상적 양식으로 혼합한 자신 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특히 그는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추상적 형태와 강렬하면서 정적인 색채, 심성을 자극하는 색채, 그리고 회화적 붓질 등 다양한 색과 선을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추상 표현주의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Arshile Gorky, Virginia Summer, 1946 드로잉에도 막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제자들에게 드로잉은 회화의 본질이며, 드로잉을 마스터하기 전에는 어떤 것도 완성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드로잉은 사실 고르키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940년대부터는 정신적 멘토였던 칠레의 가장 잘 알려진 추상표현주의자이자 초현실주의 화가 마타(Roberto Matta)의 권유로 드로잉 위에 엷은 안료를 채색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기법을 화단에 선보였다. Roberto Matta, Untitled, 1938 Arshile Gorky, Composition II, 1943 칠레인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 1911-2002)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부르게 했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자네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네”라고 말했다. 마타는 그때 자신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타는 1939년에 뉴욕으로 건너 왔다. 그는 젊고 영어를 잘해 이내 미국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마타의 아파트에 모여 자동주의 드로잉을 배웠는데 예를 들면 불, 물, 대지,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로버트 마더웰과 폴록, 그리고 고르키도 그의 아파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고르키는 특히 생을 마치기 직전 유채 드로잉을 즐겨 그렸다. 1947년에 완성된 걸작 '고뇌'(Agony)라는 작품을 위해 1946년부터 2년간 그린 그의 여러 습작들은 특별히 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Arshile Gorky, Untitled, 1946 Arshile Gorky, Untitled, circa 1946-47 Arshile Gorky, Study for Agony, circa 1946-1947 이 드로잉들은 만년의 심리 상태가 잘 드러난 격렬한 표현의 대표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Arshile Gorky, Agony, 1947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작품 '고통 (Agony)'을 그렸다. 피 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한 이 작품을 보면 고통스러운 그 자신의 모습을 그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통해 그렸음에도, 우리들의 가슴속 뜨거운 무엇인가가 목메여 올라오는 느낌을 받는다. 중앙에서 왼쪽을 향한 것은 치과 의자를 의인화한 것이며, 의인화한 기계 중앙에 발기한 남성의 성기처럼 생긴 것은 털이 달린 원시인들의 숭배물을 상징한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예술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그는 식물에서 주로 그 형태들을 가져왔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런던의 데이트 모던갤러리, 로스 앤젤러스의 MOCA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20세기 최고의 추상파 화가 아쉴 고르키(Ashile Gorky: 1904-1948)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고, 특별 전시를 통해 이미 엄청난 관객도 동원한 바 있다. 그는 일찍 세상을 저버리긴 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 사랑을 받으며 기억되고 있다. Arshile Gorky, Good Afternoon, Mrs. Lincoln, 1944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67억원에 거래됨) (다음에 계속…) 최지혜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 아트컨설턴트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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