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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2020.06.01 23:31

모든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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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네 번째 이야기
모든 사랑으로…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음악 이야기


2020년의 여섯 번째 달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애쓰지만 어디선가 불쑥불쑥 고약한 얼굴을 들이미는 바이러스 때문에 좀처럼 속도가 붙질 않는다. 

끝이 가늠되지 않는 길 위에서 정신적 피로도는 높아지고 조금씩 지쳐간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관계의 단절과 사회적 고립을 가져왔고, 그 위세 앞에 가려졌던 많은 것들이 민낯을 드러냈다. 자유, 생명, 신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보편적 가치의 기준이 저울질 당했고 각자가 지닌 서로 다른 무게감이 균열을 일으켰다. 

그 갈라진 틈 사이를 비집고 바이러스 자체보다 공격적이고 깊은 생채기를 남기는 차별과 혐오가 자라난다.

언제부턴가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된 것처럼, "Miss Corona!", "칭, 챙, 총".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 역시 일상이 되어버렸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은 베를린의 한 한국인 유학생 부부에게도 이유 없는 비웃음과 조롱을 쏟아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언어폭력과 성희롱에 상처 입은 부부의 사연은 한국 매스컴에서도 크게 보도가 되었고, 현지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 유력 일간지에서는 신문 전면을 할애해 "Bei aller Liebe (모든 사랑으로)" 라는 제목으로 그들이 겪은 인종차별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신문 전면의 한 가운데를 차지한 부부의 사진과 붉은색 바탕의 '모든 사랑으로' 라는 문구에 위로를 받은 걸까? 굳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어도, 이방인으로서 타지에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겪었던 원인 모를 억눌림이 스쳤다. 눈치 주는 이도 없는데, 괜히 눈치가 보이고, 조롱과 차별 앞에서 괜히 문제를 만들기 싫어 쓴소리를 삼켰던 모습들이 지나갔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할퀴어졌던 상처 자리가 새삼 욱신거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모든 사랑으로"

거칠고 치열한 삶 앞에 음악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종이 위에 흩뿌려진 콩나물 대가리 음표들은 그 자체로 어떠한 힘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음표가 악기를 통해 연주되고, 누군가의 목소리로 불리워질 때 음악은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선율과 마음이 만나 위로를 건네고, 불합리함에 맞설 힘을 전하며, 세상이 할퀴고 간 상처의 자리를 매만진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게> An die Musik D.547

슈베르트 역시 음악가로서 비슷한 고민을 했었나 보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인생의 무게를 오롯이 홀로 짊어진 그에게 위로를 건넨 것은 '음악'이었다. 고독한 걸음에 사랑의 온기를 더하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한 원동력이 바로 '음악'이었던 것이다.

Franz_von_Schober,_An_die_Musik.jpg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게> An die Musik 자필 악보


"그대 고귀한 예술이여 /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 거친 삶의 올가미가 나를 옥죄일 때면 /
그대 나의 마음에 따스한 사랑을 불 지피고 /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나를 이끄네 /
이따금 그대의 하프 선율을 타고 한숨이 새어 나오고 / 그대는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으로 / 보다 나은 시절의 하늘을 내게 열어주네 / 고귀한 예술이여, 그대에게 감사를"

1817년 슈베르트가 20세 청년 시절 작곡한 곡으로 친구 프란츠 쇼버의 시에 곡을 붙였다. 10년 후인 1827년 4월 27일 슈베르트는 이 곡을 오스트리아 빈의 피아니스트 알베르트 쇼빈스키에게 헌정한다.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기본에 충실하게 꽉 찬 화성은 마치 슈베르트의 마음 같다. 담담하게 8분 음표가 이어지고 그 위를 소박하지만 온 마음을 담은 진심 어린 선율이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을 남긴다.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누군가 용기 내어 내디딘 한 걸음의 발자국이 만든다. 그 발자국이 늘어날수록 현실과 이상향의 간극은 좁아질 것이고, 그 흔적을 따라 걷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 자리엔 새로운 길이 날 것이다. 


안토닌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Z nového světa Symphony No.9 e-minor op. 95

1892년 보헤미아 출신 작곡가 드보르작은 미국 뉴욕 음악원의 교수직을 제안받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미국 땅을 밟는다. 역동적 에너지가 넘치는 땅에서 새로운 광경들을 접했고, 보고 느낀 것들을 곡으로 남겼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드넓고 광대한 서부로 여행을 하기도 했으며, 이때 흑인 음악과 원주민들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게르만족으로부터 탄압의 역사를 경험한 체코 보헤미아 출신의 음악가로서 흑인과 인디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던 인종차별에도 동정과 공감을 품었을 것이다. 
그는 이국땅 미국에서 흑인 음악과 인디언 음악을 재료로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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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닌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e단조 <신세계로부터> 자필 표지


<신세계 교향곡>으로 알려진 교향곡 9번을 발표한 후 가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도 흑인음악, 인디언 음악에 대한 관심을 밝혔다. "나는 미국 원주민의 멜로디를 주의 깊게 연구했고, 그들의 정신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흑인 음악과 미국 원주민들의 음악은 거의 비슷합니다. 멜로디를 직접 차용하지는 않았지만 신세계 교향곡을 통해 그 정신을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흑인 음악과 원주민 음악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도레미솔라' 5음계로 이루어진 펜타토닉 스케일인데 이 음계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아리랑'이나 '도라지 타령' 등 우리나라의 민요도 대부분 '궁상각치우' 5음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신세계 교향곡>은 광고음악에도 많이 쓰이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에도 늘 이름을 올린다.

1893년 작곡된 이곡은 12월 15년 카네기 홀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Z nového svĕta (From the new world)라는 부제목 역시 드보르작이 직접 붙였다.

·1악장  - Adagio-Allegro molto
·2악장 - Largo
·3악장 - Scherzo, molto vivace
·4악장 - Allegro con fuoco

네 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9번은 고향을 향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듯한 2악장과 광활한 서부 광야를 가로지르는 듯 웅장한 4악장이 특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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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안토닌 드보르작, 우.드보르작 교향곡 9번 2악장 잉글리시호른 솔로 악보)

이 중 2악장 잉글리시 호른 멜로디는 드보르작 제자 윌리엄 피셔가 가사를 붙여 <Going home>이라는 노래로 만들었고, 우리나라에는 <꿈속의 고향>으로 번안되었다.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아 / 지금은 사라진 친구들 모여 /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 반딧불 쫓아서 즐거웠건만 /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
그리운 고향 아 아 내 고향 / 밤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일 때면 / 영혼의 안식처 찾아 헤매네 / 밤마다 그리는 그리운 고향 / 영혼의 안식처 찾아 헤매네 / 그리운 고향 내 고향 

세상의 반대편에서 발견하는 서로 비슷한 선율이 놀랍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비슷한 정서가 반갑다. 전혀 달라 보이는 많은 것들의 끝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다름'이 '차별'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갑작스레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가 얼마나 촘촘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지 비로소 인지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접촉금지', '집합금지'... 2020년을 시작하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단절'을 일상화 시켰다. 

물리적 단절과 더불어 모습을 드러낸 차별과 혐오는 우리가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 더 시급하게 치유해야 할 아픔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환상 속에서 올바른 세상을 봅니다 / 그곳에선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곳 / 나의 환상 속에서 난 밝은 세상이 보입니다 / 그곳은 밤도 어둡지 않습니다 /
나의 환상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 그 바람은 친구처럼 도시로 불어옵니다 /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 곳"

영화 <미션>의 삽입곡 <가브리엘의 오보에> 멜로디에 곡을 붙인 엔리오 모리꼬네의 <넬라 판타지아> 가사처럼, 나는 꿈꾼다. '다름'이 '틀림'으로 비난받지 않는 사회. 그리고 세상이 낸 상처의 조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은 '모든 사랑으로' 메울 수 있는 사회를.

세상은 때로 견디기 힘들만큼 불합리하고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 꿈꾸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희망한다.

마음이 부서진 모든 자리에
'사랑' 한 조각 건네며 


음악 칼럼니스트 여명진 크리스티나
mchristinay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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