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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2020.08.05 00:16

비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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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여덟번째 이야기
비 내리는 날
비, 천둥, 번개를 담은 클래식 음악


벌써 며칠째 비가 내린다.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비 피해 소식이 끊이질 않고 있다.
산이 무너지고, 도시가 물에 잠기는 모습을 보며, 인간은 자연의 위력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창작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자연의 모습을 그려낸 문학작품과 음악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 비와 천둥·번개를 담은 음악을 소개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궂은 날씨> Op. 69, No. 5
Richard Strauss <Schlechtes Wetter>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독일 후기 낭만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으며, 문학작품과 연관이 있는 작품을 많이 작곡했다. 니체의 철학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를 작곡했고,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 <살로메>와 <장미의 기사> 등이 유명하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를 가사로 작곡한 가곡 <궂은 날씨>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창가에 앉아 바라본 집 밖 풍경을 음악으로 그리고 있다.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처럼 곡의 빠르기말 역시 Ziemlich rasch(상당히 몰아치며) 이다. 거칠게 내리는 비가 바람에 꺾여 창문에 부딪히는 듯 피아노 반주는 빠른 속도로 사선을 그린다. 마치 창가에 맺힌 빗방울처럼... 


1Schlechtes Wetter.jp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궂은 날씨> 악보, Adolph Fürstner 출판사)


아주 궂은 날씨 / 비가 내리고 폭풍이 휘몰아치며 눈까지 내린다 / 나는 창가에 앉아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본다 / 외로운 불빛 하나 희미하게 깜빡이며 천천히 걸어온다 / 램프를 든 할머니가 바람에 흔들리며 길을 건너고 있구나 / 내 생각엔 밀가루와 달걀, 버터를 샀으리라 / 다 큰 딸들을 위해 케이크를 굽고 싶은가 보다 / 집안 안락의자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 굵은 황금색 곱슬머리가 예쁜 얼굴 위로 흘러내리네


밖은 정신없이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고요한 집안에 앉아 위태롭게 길을 건너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니 조르조네의 그림 <폭풍우>가 떠오른다. 

2Giorgione The Tempest.jpg
조르조네 c. 1505, <폭풍우>,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어떤 사연이 담긴 그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폭풍우가 몰려오고 번개가 내리치는 밤에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그리고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 불안함과 평화로움이 오묘하게 뒤섞인 이 그림은 슈트라우스의 <궂은 날씨>가 주는 묘한 분위기와 상당히 흡사하게 다가왔다. 곧 쏟아질 폭풍우를 뒤로하고 벌거벗은 채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과 휘청휘청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딸에게 구워줄 케이크 재료를 사 오는 할머니. 그 두 여인이 슈트라우스와 조르조네를 이어주고 있다.


유스틴 하인리히 크네히트 <천둥번개가 깨뜨린 목동의 기쁨>
Justin Heinrich Knecht <Die durch ein Donnerwetter unterbrochenen Hirtenwonne>


크네히트는 독일 오르가니스트이며 작곡자이다. 크네히트는 <천둥번개가 깨뜨린 목동의 기쁨>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천둥소리를 묘사했다. 크네히트가 활동하던 당시에 프랑스 지역에서는 Claude Bénigne Balbastre, Michel Corrette 등이 오르간으로 천둥번개 소리를 재현했고, 20세기 초까지 스위스 Fribourg 지역에서는 천둥번개를 오르간 소리로 묘사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다.


크네히트의 곡 <천둥번개가 깨뜨린 목동의 기쁨>은 다섯 부분으로 되어있다. 

3Knecht Inhalt.jpg

(유스틴 하인리히 크네히트 <천둥번개가 깨뜨린 목동의 노래> 악보, 
자필 내용설명, 1794년, 독일 튀빙엔 대학 도서관 소장)


1.  유쾌하게 흥얼대는 목동의 노래
2.  다가오는 비구름, 천둥과 습한 공기가 악천후를 알리고 
     목동의 기쁜 노래를 방해한다
3.  격렬한 천둥소리를 뚫고 들리는 목동의 불평 소리
4.  점점 날이 개고
5.  다시 이어지는 목동의 노래

크네히트의 곡은 1808년 초연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심포니 6번 <전원교향곡>과도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전원교향곡> 역시 다섯 개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악장 : 전원에 도착해 깨어나는 유쾌한 기분
2악장 : 냇가의 정경
3악장 : 농부들과의 유쾌한 시간
4악장 : 번개, 폭풍
5악장 : 목동의 노래. 악천후가 지나간 기쁨과 감사

크네히트가 자연의 풍경을 직접적으로 묘사했다면 베토벤은 보다 정서적인 표현에 집중했다. 베토벤은 “그림보다 더 감각적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직접 악보에 써넣기도 했다.

베토벤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크레셴도와 반음씩 상승하는 트레몰로 등으로 다가오는 폭풍과 천둥, 긴장감을 그려냈다. 또한 넷잇단음표와 다섯잇단음표를 동시에 연주하게 해 불안한 분위기를 묘사했다. 이따금 금관 악기들의 짧은 음들이 번개같이 번쩍이고, 그 뒤엔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스타카토 음들이 폭풍우 치는 전원의 풍경을 연주했다.

크네히트의 곡 안에는 스무 번의 서로 다른 천둥소리가 나오는데, 다가오고 멀어지는 천둥소리의 묘사 방법을 직접 악보에 기재해 두었다. 

4Knecht Donnerwetter.jpg
유스틴 하인리히 크네히트 <천둥번개가 깨뜨린 목동의 노래> 자필악보




늘임표(Fermata)와 손바닥이나 팔 전체를 이용해 여러 음을 동시에 누르는 톤 클러스터(Ton-Cluster)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늘임표 아래에는 천둥의 묘사할 방법이 기재되어 있다.
 
짧고 아주 먼 천둥, 페달 없이
좀 더 길지만 먼 천둥, 페달 없이
약간 강하고 긴 천둥, 페달 없이
짧고 약한 천둥, 페달 없이
강하고 긴 천둥, 페달 없이
가장 센 천둥, 손 건반과 페달
세고 긴 천둥, 손 건반과 페달
약해진 천둥, 페달만
아주 멀고 짧은 천둥

‘톤 클러스터 기법’을 근대 또는 현대 음악만의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둥과 번개 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자주 사용한 방법도 ‘톤 클러스터 기법’ 이었다.

5donnerbrett.jpg

오르간 페달 간격에 맞게 제작된 나무판을 사용해서 도, 도#, 레, 레#, 미 음들을 한꺼번에 누르며 천둥번개 소리를 표현하기도 했다.
현대 음악인들 역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기발한 표현 방법을 고민하지만,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며칠째 그칠 줄 모르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매섭게 쏟아진 비는 우리 일상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비는 없고, 지지 않는 해는 없으니, 비가 멎으면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이다. 비가 할퀴고 지나간 모든 곳이 멀지 않은 날에 회복되기를...

무지개가 뜨는 내일을 기다리며

음악 칼럼니스트 여명진 크리스티나
mchristinay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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