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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2020.09.29 19:35

달빛에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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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의 음악일기 열두 번째 이야기
달빛에 취해


1shutterstock_686709811.jpg 
(사진= shutterstock)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 이해인 <달빛 기도>




추석 한가위.

한국에 있었다면 명절 맞이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을 테지만, 타지에서 맞이하는 한국의 명절은 낯섦과 어색함, 외로움이 앞선다. 특히 추석과 같은 음력 명절에는 한국과 유럽의 거리감이 더욱 실감 나기 마련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유럽풍경 속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이 유난히 반갑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떨어진 모든 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가을밤을 밝히는 달빛, 그 고운 숨결에 취해본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
Ludwig van Beethoven - Piano Sonata No. 14 <Moonlight>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은 흔히 '월광', '달빛' 소나타로 많이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직접 붙인 제목은 아니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고 5년 후, 독일의 시인 루드비히 렐슈탑이 이 곡의 1악장을 들으며 "달빛이 비친 루체른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조각배를 떠오르게 한다" 라고 표현한 것이 큰 공감을 얻으며 '월광 소나타'라고 불리게 됐다.

이 곡은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제자이자 그의 연인이었던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되었다. 연이어 사랑에 실패하고, 청력마저 잃어가며 절망에 빠져있던 베토벤에 다가온 작은 위로. 그 사랑이 달빛에 비친 잔잔한 물결 위에 일렁이듯 1악장은 고요하게 흘러간다.
반복되는 동일한 음형 사이로 조심스레 변화하는 화성과 부드럽지만 무게감 있게 건반 위를 옮겨가는 베이스 음들에 베토벤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2베토벤 월광 1악장.png

3악장 Presto Agitato는 고요한 1악장과 대비되는 분위기이다.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마구 질주한다. 베토벤은 본인이 사랑한 여인들과 잘 맺어지지 못했는데 줄리에타 역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꾹꾹 눌러 담은 슬픔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듯,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건반 위를 채운다.

고뇌하고 투쟁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던 베토벤에게 다가온 뜨거운 사랑처럼,
루체른 호수 물결에 부딪혀 반짝이던 달빛. 아름다웠던 그 짧은 순간이 오랜 쓸쓸함과 슬픔을 위로하기를...

3Luzern.jpg
▲ 스위스 루체른의 카를교 야경 (사진=Luis Kang)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
Claude Debussy <Clair de lune>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만큼 널리 사랑받는 드뷔시의 피아노곡 <달빛>은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세 번째 곡이다. '베르가마스크'란 프랑스어로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 지방을 뜻하는데, 베르가모 지역을 여행한 후 드뷔시가 1890년에 작곡했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신비롭게 쏟아지는 듯한 글리산도 주법이 몽환적이고 달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드뷔시는 프랑스 서정시인 폴 베를렌의 양어머니인 모테 부인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달빛>은 베를렌의 시 <하얀 달>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별들이 달빛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한 드뷔시의 <달빛> 선율은 폴 베를렌의 시 <하얀 달>의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음표로 그려놓았다 할 만큼 닮아있다.

별들이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에서
크고 포근한 고요가 내려오는 듯
아득한 이 시간
-폴 베를렌의 '하얀 달' 중에서



로베르트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의 <달밤>
Robert Schumann, Johannes Brahms <Mondnacht>

독일 낭만음악의 대표 작곡가 슈만과 브람스 두 사람 모두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요셉 아이헨도르프의 시 <달밤>을 가사로 가곡을 작곡했다.

마치 하늘이 땅에게 / 살며시 입을 맞추는 것처럼 / 땅은 은은한 꽃빛 속에서 / 하늘을 꿈꾸네 /

들녘에 바람이 불어오고 / 밀 이삭은 부드럽게 물결치며 / 숲들은 나직이 소리 내고 / 그토록 별빛 맑은 밤이었네 /

그리고 내 영혼은 / 나래를 활짝 펴고 / 고요한 대지를 날았네 / 마치 집으로 가는 것처럼 /

두 작곡가의 <달밤>은 다른 듯 닮아있는데 두 곡 모두 3/8 박자이다. 슈만 곡의 빠르기말은 '부드럽고, 비밀스럽게', 브람스 곡의 빠르기말은 '꿈을 꾸듯'이다. 두 곡 모두 피아노 파트가 달빛이 비쳐 일렁이는 잔잔한 호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4Schumann Mondnacht-1.jpg
▲로베르트 슈만의 <달밤> 악보

5Brahms Mondnacht-1.jpg
▲요하네스 브람스의 <달밤> 악보

슈만과 브람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또 제자 브람스는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40년 동안이나 짝사랑했다. 
클라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기 위해 슈만은 3년간의 법정 소송도 불사할 정도로 둘은 애틋한 사랑을 했다. 결혼 후 서로에게 음악적, 정신적 동반자가 되어주었지만, 슈만은 후에 자살 시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클라라는 남편 슈만을 끝까지 곁에서 지켰고, 브람스는 그런 스승의 아내 클라라만을 바라보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956년 슈만이 죽고 난 이후 그들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서로의 곁을 지키며 남은 세월을 살다 1895년 클라라는 영원히 브람스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자유롭지만 고독한(Frei aber einsam)' 삶을 살던 브람스도 죽음을 맞이한다.

사연이 닿아서일까, 클라라의 사랑을 가득 받는 스승 슈만의 <달밤>은 부드럽고 서정적이게, 제자 브람스의 <달밤>은 고독하고 애절하게 느껴진다.

제법 차가워진 가을밤, 눈을 들어보면 베토벤, 드뷔시, 슈만, 브람스… 그들이 스쳐 보낸 수많은 달빛을 만날 수 있다.
달은 차면 기울고, 달이 기울면 또 채워질 것이니, 어떤 이야기가 내 앞에 놓여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온유한 한가위 달처럼 온유하게, 넉넉하게 세상을 품어보자.

그대를 향한 그리움과 아련함이
한가위 달빛에 닿아 전해지기를 바라며

음악 칼럼니스트 
여명진 크리스티나
mchristinay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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