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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21.03.15 04:3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2부
조회 수 842 추천 수 0 댓글 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2부 2. 위버멘쉬의 행복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을 무신론으로든 유신론으로든 범주화시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사람들은 먼바다를
바라보고는 신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 너희들을
가르쳐 위버멘쉬를 이야기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니체가 바다에 비유한
위버멘쉬는 새로운 신이 아니다. 위버멘쉬는 인간이 이
지상에서 구현해야 할 이상적 인간유형이다.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의거해 매 순간 자기극복을 하는 사람에 대한 명칭이 위버멘쉬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그 스스로 창조해간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자신의 의지에 의해 구성해간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
긍정적이고 삶에 긍정적인 사유방식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I have my
life(나는 내 삶을 가진다)’는 말이 잘못된 표현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
자체이기 때문에 삶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변화하는
우리 자체이다. 우리는 매일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모습의 자기를 만들어간다.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서 천국을 경험한다.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인간의 창조의지를 긍정하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 자체가 힘에의 의지가 구현되는 장소로 생각했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을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로 만든다. 힘에의 의지가 창조의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창조의지의 목적으로
니체는 자신의 현 상태를 극복하는 자기극복적인 삶, 위버멘쉬적 삶의 구현을
말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는 너자신을 잃고 몰락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너는 결코 새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늘은 날개, 색, 옷, 그리고 힘이었던 것이 내일은 단지 재가 되어야만 한다.” 즉, 넘어섬이란, 에고(ego)의 극복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에고(ego)로서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being)로서 깨어있고(aware) 현재(present)를 의식하면(conscious) 우리의 매 순간이 새롭다고 했다. 이렇듯,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이었다. 이 때 극복은 견디고 이겨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에고(ego)를 알아차림으로써(aware) 갇혀있던(‘자기 보존’, trapped) 우리 자신(who we are)을 인식하는 것이다(awaken). 니체는 고독한 그의 여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이 때 죽음은 숨쉬고 있는 생물학적 사람들의 사망이라기보다는 새로움의 또 다른 의미이다.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과거의 기억(memories)은 기억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늘의 나’는 늘 ‘과거의 나’가 되어 우리의 기억이 되어 버린다. 니체도 에크하르트 톨레도 ‘지금의 나’가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자기 보존’)보다는 ‘지금의 나’(‘자기 극복’)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명 있는 것은 자신의
힘을 발산하고자 한다. 즉, 생명 그 자체가 힘에의
의지이다. 니체의 힘의지의 세계에는
최종적 목적이 없다. 어떤 외재적인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지의 세계는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우연이란 있을
수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생명은 다음과 같은
비밀도 내게 직접 말해주었다. ‘보라,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물론 너희들은 그것을
불러 생식의지 또는 목적, 보다 높은 것, 보다 먼 것, 보다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요, 동일한 비밀이다. 이 하나를 단념하느니
나는 차라리 몰락하겠다. … 참으로, 나의 힘에의 의지는
진리를 향한 네 의지조차도 발로 삼아거닌다!”
차라투스트라는 인류에게 자신의 심원한 사유를 가르치는 것으로 인간애를 표현했다. 자신의 인간애를 이해 받지 못해 고독해 하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자체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자신의 수행을 계속했다. 니체가 말하는 ‘새로운 가치 기준’은 무엇일까? 이는 존재자 스스로의 내면에 함유되어 있는 힘에의 의지, 즉 생의 의지이다. 한층 생동함으로써 현 단계를 넘어 스스로를 부지런히
확장해 나가는 의지이자,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발현토록 하는 창조적인 의지인 힘에의 의지는 삶의 근본법칙이다. 삶은 항상 상승과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상승과 강화를 통해 삶은 자기극복 과정 자체가 된다. 이런 생명력으로 충만한 자가 바로 ‘종래의 인간 유형을 넘어서는 인간’, 즉 신을 부정했던 차라투스트라가 이상적인 존재로
보았던 위버멘쉬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 질 들뢰즈(Gilles Deleuze)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니체의 자기극복이 기존의 가치를 해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했다. 비판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세속적으로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들에 의심을 품고 질문함으로써 이를 해체해야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세속적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의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우리는 ‘자기보존’이 아니라, 창조적인 의지를 통해 ‘자기극복’을 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진정한 우리의 본질(essence)를 의식한다는(conscious) 것이 에고(ego)의 세상을 무시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즉, ‘자기극복’를 한다는 것은 ‘자기보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인 생성의 힘에의 의지를 통한 ‘자기극복’, 그러니까 자신의 본질(essence)을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보존’, 즉 우리 에고(ego)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어진 수행(performance)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외부의 현실의 한 차원과 내면의 본질의 한 차원, 두 차원을 통합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생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니체는 허무주의나 자기부정을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생성의 의지, 힘에의 의지를 통해 우리들에게 진정한 자신을 찾는 ‘자기극복’을 함으로써, 생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기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삶에 대한 강한 긍정적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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