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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예술칼럼
2022.03.11 16:02
재스퍼 존스 : “나는 다른 사람이 했던 게 아니라, 단지 내가 해야 할 것을 하기로 결정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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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존스 : “나는 다른 사람이 했던 게 아니라, 단지 내가 해야 할 것을 하기로 결정했다” (3)
2. 미국인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 세계2차 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이 사실상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진 것에 대해 미국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예술가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뉴욕 미술계의 대세였던 추상표현주의의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같은 작가들도 거장으로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이런 주류 스타일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뉴욕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한 당돌한 예술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다. 그는 “나는 다른 사람이 했던 게 아니라, 단지 내가 해야 할 것을 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감성의 표현과 추상성, 그리고 평면성을 강조한 주류 선배 세대의 추상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그는 일상의 오브제를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흡수시켰다. 그는 1961년부터 실제 오브젝트를 캔버스 위에 붙이기 시작했었다. 어렵고 진부한 정서적 표현이 배제된 그의 이런 초기 작품들의 방식은 이후 많은 팝 아티스트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1970년대에는 평행선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crosshatchings(크로스 해칭)’기법을 사용했고, 1980년대에는 형상화 실험을 이어갔다. Jasper Johns, Dancers on a Plane, 1980–1 ©Tate gallery
그리고, 끊임 없는 연구로 찾아낸 기법으로 그림 속 평범한 오브젝트들을 아예 트렌드화, 아이콘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그는 완벽하게 새로운 미술을 끊임없이 선보였다.
3. 존스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존스는 뉴욕, 도쿄, 그리고 세인트 마틴의 캐러비언 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살면서 자신의 생각과 예술의 방식을 형성해 나갔다. 휘트니 미술관의 이번 전시를 통해서 그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와의 관계를, 그리고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통해서는 그와 도쿄와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는 1947년부터 1948년까지 3 학기 동안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1949년에는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학교에도 잠시 다녔다. 그러다가 한국의 6.25전쟁 당시 1952년과 1953년 사이에는 일본 센다이에 파병되기도 했다. 하지만, 뉴욕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는 어린 시절과 군대 시절을 거의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보냈다. 1954년 뉴욕에 돌아온 그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머스 커닝엄, 존 케이지 등을 만나 친해졌고 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그들과의 이런 창조적인 관계에 푹 빠져 있던 그는 어느 날, 마치 새로운 것을 찾아낸 듯 자신의 과거의 작품들을 거의 모두 부서버렸다. 그러다가, 연인이었던 로버트 라우젠버그와 헤어진 후, 1961년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에디스토 비치로 다시 돌아왔다. 존스는 그곳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과 강렬한 걸라 지치(Gullah Geechee) 흑인 문화을 담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Jasper Johns, Pinion, 1966. Lithograph: two stones, one aluminum plate, 40 × 28 in. (101.6 × 71.1 cm). Printed by Zigmunds Priede; published by Universal Limited Art Editions. Edition no. 27/36.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gift of Mrs. Volney F. Righter, 66.110. © 2021 Jasper Johns and ULAE / 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그에게 이곳은 무상함, 상실감, 기억과 그리고 그리움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일상 생활과 동성애자로서의 갈망을 가감없이 작품속에 쏟아냈다. Jasper Johns, Watchman, 1967 © MoMA
4. 존스와 라우센버그 당시 세계 미술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생성의 속도 만큼이나, 퇴색도 또한 엄청나게 빨리 진행됐다. 아주 견고하게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던 추상표현주의가 급속히 약화되고, 그 자리를 대신 꿰찬 것은 다름 아닌 팝아트였다. 일련의 화가들이 추상표현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혁신적인 변화를 도모했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 )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가 있었다. 두 사람은 1955년부터1956년까지 연인 관계로 뉴욕의 같은 빌딩에 화실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들은 추상표현주의에 의해 사라져버린 이미지들을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다시 회복시켰다. Jasper Johns, Green Target, 1956 © MoMA
존스는 라우센버그와의 공동작업(Collaboration)을 통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확대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각자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빠른 속도로 팝아트를 추상표현주의의 위상만큼 올려놓을 수 있었다. Jasper Johns and Robert Rauschenberg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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